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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리더 그리고 '우리' 속에 핀 꽃
한일문화칼럼  |  조선통신사・SUMMER 2020 여름호

미술작가 이장욱 

# intro 트위터 말풍선 속 한국과 일본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같은 시기에 한국과 일본 사회에 던져진 SNS 트위터는 상당히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다. 아직 이 '140자의 말풍선'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에 대한 표준이 굳어지지 않았을 때인 만큼, 사람들은 어려워했지만 마치 새로운 게임인 양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 초창기의 트위터는 한 사회를 읽는 리트머스지 역할을 했다. 한국 사람들은 인터넷 저편의 보다 많은 사람들과 연결하며 '팔로우'하기에 열중했다. 짧게 허용된 자기소개란에 와인, 커피, 맨유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키워드들로 가득 채웠고, 특정 규모의 팔로워 수를 넘기면 자축하는 메시지도 눈에 띄었다. 맞팔로우를 해주지 않으면 금방 팔로우를 끊으면서 맞팔률 계산기를 돌렸을 때 100%가 나오는 것을 목표로 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관계의 확장에 집중했다. 

   일본 사회 역시 트위터에 열광했다. 서점엔 트위터 활용법에 대한 참고도서가 빽빽이 들어찼고, 심지어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섭외해서 트위터 사용이 반영된 드라마가 발 빠르게 제작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에게 주변 일본 친구들의 트위터를 쓰는 방식은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한국 사람들과 달리 이들 계정 속 팔로워는 많아 봐야 스무 명 남짓이었다. 혹은 이보다 적거나. 이들은 단지 SNS라는 새로운 도구가 생겼을 뿐, 늘 그랬던 것처럼 정말 작은 단위의 친구들끼리 소통하기 위해 활용했다. 드라마 '스나 나레'(솔직하지 못해서)에서도 다섯 명의 젊은 남녀가 트위터를 계기로 만나게 되어, 서로 고민을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일본에서 이런 모습을 그린 드라마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이때의 흥미로운 관찰을 겪고 나서부터 말과 커뮤니케이션은 나의 작품 활동에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 作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우키요에)

#1 이것과 곳찌, 자기 '위치'를 지키는 말하기

   일본의 도넛 가게에서 첫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에, 손님에게 계산해드리겠다는 말인 "오카이케오 사세떼 이따다키마스"를 입에 붙도록 반복해가며 연습했다. 일본어 문법의 끝판왕이라고 부르는 '모라우 - 이따다쿠'를 활용한 높임말 표현인 이 말을 직역하면 "(당신에게) 계산을 시킴을 받겠다"라는 말이다. 또 일본 만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무라이나 야쿠자들은 상대방에게 '죽이겠다'라는 직접 표현인 "코로스"(殺す) 대신에 종종 '(네가) 죽는 것을 받겠다'라는 의미인 "신데 모라우"라고 말한다. 비슷한 문법 체계를 가진 우리 말에는 전혀 없는 신기한 표현이다. 정작 행동할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 가만히 있고, 행동을 통한 상대방의 변화를 역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말하여, 말하는 당사자의 능동적 의지를 완전히 거세시킨다. 그것이 비록 죽이는 행위와 같이 상대방의 뜻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길 또는 추상적 지향점을 선택할 때에 방향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 '이쪽'을 쓴다. 카페라테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를 때처럼, 사물 혹은 대상을 선택할 때에는 보통 '이걸로 할게'라고 말하지, '이쪽으로 할게'라는 표현은 좀처럼 쓰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물건을 고르는 상황에서도 종종 '이것'을 뜻하는 고레(
これ)보다 '이쪽'을 뜻하는 곳찌(こっち)를 쓴다.  '이것'은 말하는 순간부터 이미 결과물에 도착해있지만, '이쪽'을 뜻하는 일본어 곳찌(こっち)는 말하는 사람이 현재 서 있는 '위치'에서 방향만을 주시하는 모양새다. 말속에서 이미 무게중심이 뒤로 물러나있다. 말하는 사람이 소극적 태도를 취한다. 다르게 말하면 섣불리 유추 혹은 미래를 가늠하는 말하기를 하지 않으며, 신중을 기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일본 문화를 얘기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메이와쿠'이다. 일본 사람들은 남에게 메이와쿠하지 않는 것, 즉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언어의 관점에서 놓고 보면 이것은 상대방과 나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거칠고 투박한 타격에도 좀처럼 뚫리지 않는 두터운 방호벽이라기보다는 마치 얇고 투명한 막들이 포개진 유리장과 같다. 일본에서 관계란 이 섬세하고 유약한 공기의 벽을 깨지지 않게 아주 잘 관리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의 언어들은 내가 서있는 이곳에서 유리장 너머의 상대방에 접속하는 열쇠와 같다. 앞에서 열거한 것처럼 불필요하다고 느껴질 만큼 과도한 높임말이나 세분화된 표현들은 이 유리장을 조심스럽게 한꺼풀씩 열기 위해 쓰인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말 끝이 가리키는 곳을 항상 귀담아들으려 하며, 말 너머의 상황이나 본심을 섣불리 예단하지 않는다. 설령 예상한다고 하여도, 상대방이 먼저 말로서 드러내기 전까지는 확실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습관 때문에 자신의 위치를 중심으로 시야를 굳이 멀리 두려 하지 않고, 공기의 벽 안으로 확보된 자신의 영역 안에서 보장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일본 사회를 멀찌감치에서 조망해보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우키요에처럼 보인다. 이 일본식 판화와 같이 섬세한 틀로 나누어진 각자의 처소에서 안정적으로 자신의 색을 낼 수 있다. 

  이런 일본 사회를 굳어지지 않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바로 개념화에 특화된 '마이크로리더'이다. 이들은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철학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들은 노후화된 사회의 근육을 풀어주는 마사지사이자, 구획정리의 전문가이다. 낡은 단어를 걷어내고 자기 손으로 붙인 이름을 사회에 공급해, 기존의 틀을 개선하거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든다. 얼마 전까지 한국 사회를 강타했던 신조어 '소확행'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나,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라는 철학으로 일본의 대표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 MUJI(무인양품)를 설계한 디자이너 하라 켄야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일본의 마이크로리더 들이다. 이들로 인해 일본 사회가 보다 정교하고 다채롭게 변하고 있다.

#2 한국말과 문화 안의 '우리'

 

   일본 사회가 '메이와쿠'를 의식하듯이, 한국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이 바로 '우리'이다. 한국말속 '우리'에 대한 흔적은 SNS나 유튜브에 능숙한 요즘 젊은 세대의 '힙'한 문화에서부터 쉽게 눈에 띈다. 인스타그램의 해시태그는 '우리'를 찾아 잇는 대표적인 연결고리이다. 트렌드를 이끄는 '핵인싸'와 그들이 쓰는 '인싸어'는 '요즘우리'에 올라타기 위한 필수 과목이다. 한때 유행했던 '그까이꺼 대충'이란 말 또한 적당히 뭉뚱그려서 한 맥락에 올려놓고 보는 '우리'의 속성을 잘 나타낸다. 비슷하지만 결이 다른 몇 가지 목소리를 한데 묶어 더 큰 카테고리의 '우리'에 흡수시키는 마법의 단어다. 다양한 것을 두루 포괄할 수 있는 단순하고 알기 쉬운 표어가 뚜렷하게 드러나며, '우리'를 한데 모으는 인플루언서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약한다.

 

  

 

 

   일본 말이 서로의 '위치' 차이를 알아내기 위해 묻고 되묻는 모르는 척의 말 하기에 능숙하다면, 한국말은 어떻게든 '우리'의 흐름에 올라타려고 아는 척의 말 하기가 발달한다. 트위터의 예에서처럼 일종의 같은 색깔 말하기 게임이다. 같은 취향의 말을 꺼내거나, 같은 행동 양식을 공유하며 '우리'에 올라탄다. 전통적으로는 학연이나 지역 연고가 있고, 같은 시대정신을 공유한 세대나, 정치 성향도 '우리'로서 기능한다. 대중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음악, 인기 드라마와 같이 사회에 흐르는 유행 또한 '우리'를 엮는 적극적인 매개가 되었다. 일본 사회에서 보이는 오타쿠나 마니아층과 같은 '자기 집단'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성질은 조금 다르다. '우리'는 열기나 기류와 같다. 일정 기간을 강력하게 장악할 순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합집산을 하며 변한다. '우리'라는 강력한 구호 속에는 같은 목소리, 같은 행동 양식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 대한 배타적 그림자도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보다 큰 '우리'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 가장 큰 단위의 '우리'인 '우리나라'가 있다. 지금도 한국 사회에선 국민 배우, 국민 MC, 대국민 사과와 같은 말들이 버젓이 통용된다. '우리'의 장점이 강하게 발현된 사건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이었다. 민주화 운동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IMF 외환 위기 때의 금 모으기 운동, 2002 월드컵의 붉은 악마, 세월호 사건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 그리고 촛불 집회 등이 있다. 최근에 불어닥친 전대미문의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한국 사회에서는 참여적이고 희생적인 형태의 '우리'가 발동하였다. 

광화문 촛불 집회와 붉은 악마 응원단

#3 마이크로리더 그리고 '우리' 속에 핀 꽃

 

   이처럼 언어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읽을 수 있는 좌표이다. 지금까지 어떤 말이 유통되는지 또 어떻게 말을 다루는지가 한 사회의 문화와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언어 속에서 발견한 문화적 특징을 기준으로 두 나라를 대표할 만한 미술 작가를 골라보겠다. 이를 통해 언어에서 드러나는 것들이 단순히 문화의 지문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는 수많은 모세혈관으로 얽혀서 같이 자라나고 있음 역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미술을 대표할 만한 '마이크로리더'는 의외로 쉽게 떠오른다. 바로 일본의 대표적인 팝 아티스트인 무라카미 다카시이다. 기이하지만 귀여운 모습의 다양한 캐릭터들을 캔버스에 고스란히 옮겨 놓은 그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저절로 밝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대학에서 일본화를 전공하였지만, 서구 미술을 그대로 따라가는 당시 일본 미술의 한계에 염증을 느꼈다.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간 그는 오타쿠를 비롯한 일본식 하위문화에서 일본의 고유함을 찾으려 하였다.  2차원 만화 그림들과 '슈퍼 플랫'이라는 말로 '깊이와 두께가 없이 납작한 현대 문화의 경박함'을 비판하였다. 이후 그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들은 일본 전통미술과의 접목에서부터 루이뷔통과 같은 명품 브랜드와의 협업까지 다양한 영역으로 진출하였다. 2005년 뉴욕에 위치한 '제팬 소사이어티'에서 그는 아주 중요한 전시회를 발표한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했던 원자폭탄의 이름을 딴 <리틀 보이 : 폭발하는 일본의 서브컬처 아트전>이 바로 그것이었고, 이를 통해 그와 맥을 같이하는 다양한 일본의 아티스트들을 소개한다. 이제 '슈퍼 플랫'은 처음 그가 말하려던 비판의 메시지를 넘어, 그를 비롯한 일본식 하위문화의 창조적 환상을 담는 플랫폼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마침내 그는 현대미술가로서 세 번째,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베르사유궁에 초대받아 개인전을 열게 된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만화를 비롯한 오타쿠 문화를 미술이라는 고급문화에 접목시켰다는 평을 듣지만, 정작 만화가나 오타쿠들에겐 환영받지 못했고, 미술계 안팎에서도 그의 상업적 성공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들이 있다. 하지만  유럽에 일본 문화의 붐을 일으키며 일본 미술을 서양 근대 미술사의 상단에 올려놓은 '우키요에'가 실은 에도시대의 하위문화였던 가부키 극의 브로마이드나 포장지 따위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주장했던 '슈퍼 플랫'은 생각보다 두텁고 깊이 있는 말이지 않을까.

 

  '우리'의 특성을 담은 한국의 미술작가를 고르는 것은 일본의 경우와 달리 상당히 애를 먹었다.  우선 '우리'의 형태를 띤 작가 그룹으로 시야를 좁히기로 했다. 한국에는 팀으로 활동하는 수준 높은 작가 그룹이 제법 있다. 그중에서 다음에 소개할 팀이 바로 10년 이상 꾸준히 파트너십을 보여준 문경원&전준호 아티스트 듀오이다. 이미 각자 미술작가로서 두각을 드러내며 활약하던 두 작가는 2000년대 후반부터 의기투합해 공동 작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 느꼈던 고민과 한계를 발판 삼아, "이 시대에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장기적 예술 프로젝트를 구상하였다. <미지로부터의 소식(News from Nowhere)>이라 이름 붙인 이 프로젝트는 미술 안팎의 여러 전문가 및 조언자를 찾아 함께 질문과 고민을 나누는 실천적 플랫폼의 형태를 띠었다. 그리고 프로젝트 과정에서 겪은 시도와 생각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줄 결과물로서 <세상의 저편(el Fin del Mundo)>이라는 제목의 두 개의 채널로  구성된 영화 작품을 제작했다.  환경 문제로 인류가 맞닥뜨린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종말 전과 후의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더듬어보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이를 영화배우 이정재, 임수정 씨가 연기했다. 작품은 2012년 독일에서 열리는 세계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 행사 '카셀 도큐멘타'에 초청되어 처음 선보였고, 같은 해에 광주비엔날레의 최고상과 그해 첫 회로 열린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국내외 미술계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에도 십 년여를 동일한 주제의 연장선에서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며 베니스 비엔날레나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 등에 후속작들이 소개되었다.

 

   두 작가의 놀라운 점은 이렇게 거대하고 묵직한 프로젝트를 협업의 형태로 진행하면서도, 동시에 각자의 작품 활동 또한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겠다. 두 개의 뚜렷한 주제가 치열한 다툼을 통해 완성되는 이들의 '우리'는 모두를 하나로 활활 타오르게 하는 심플한 구호의 모습은 아니다. 이들은 팀으로서 뚜렷한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기보다는, 디렉터 역을 자처하며 전체를 조화롭게 잇는 느슨한 연대를 조직한다. 그리고 더 큰 '우리'가 나눠야 할 이야기의 장을 펼친다. 이들이 보여준 '우리'의 백미는 최근에 발표한 공공미술 프로젝트 <스테이션(Station)>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한중일 세 나라를 대표하는 미술작가들이 모여서 아시아의 화합과 미래를 상징하는 하나의 공공예술품을 창작하는 아주 실험적인 도전이다. 거장 쟝 샤오강과 야나기 유키노리가 각각 중국과 일본을 대표하여 참여하는 가운데, 한국의 대표가 바로 문경원& 전준호였다. 세 팀이 각각 한 파트 씩 맡아서 하나로 연결시키는 과정 중에 충돌이 발생했다. 일본과 중국 두 나라의 대표 작가들이 표현에 대한 고집에 있어서 물러섬이 없었

다.  이때 한국의 두 작가가 놀라운 제안을 통해 공동작품을 완성시킨다. 이들은 조명과 사운드 만을 활용하여 양쪽 조형물을 한데 감싸 하나로 끌어안았다. 협업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보다 큰 '우리'에 접속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다부지게 꽉 채우거나 한없이 비울 수 있는 중에 어느 지점에 서야 할지를 아는 것인데, 이것이 오랜 기간 동안 호흡을 맞춰오며 자연스럽게 체득한 그들만의 '조율과 양보 그리고 배려'의 미덕이 아닐까. 이들의 수준 높은 '우리'활용법이야말로 나라 안팎으로 완고함이 만연한 지금 이 시대의 새로운 귀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대미술가 무라카미 다카시

영화 '세상의 저편'

공공미술 '스테이션'

*참고자료

위키피디아 무라카미 다카시

JTBC 특집 다큐 <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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